왜 직원들끼리 싸우게 될까? 원인은 회사의 무책임

오후 세 시 사십 분. 모니터 구석에 메신저 창이 하나 더 떴다. 아직 손도 못 댄 서류 더미 옆에는 점심 먹고 사 온 커피가 놓여 있다. 나처럼 지쳐서 미지근해진 커피다. 그걸 밀어두고 창을 열었다. 다른 부서 직원이다.
"이거 해야되는데 확인바랍니다."
인사도, 설명도, 기한도 없다. 첨부파일 하나가 전부다. 이걸 왜 내가 확인하지. 확인만 하라는 건가, 아니면 해달라는 건가. 지난달에도 비슷한 걸 한 번 받아줬는데, 그게 화근이었나. 여기서 "이건 저희 쪽 일이 아닌 것 같은데요"라고 쓰면 나만 까칠한 사람이 되는 건 아닐까. 결국 파일을 연다. 아무도 내 일이라고 정해준 적 없는데.
웃긴 건 저쪽도 사정이 비슷하다는 것이다. 그쪽 자리에서는 '이 정도도 안 도와주나' 하며 답장을 기다리고 있을 테고, 나는 이쪽에서 '또 나한테 떠넘기네' 하며 파일을 넘기고 있다. 같은 회사, 같은 층, 같은 커피 머신을 쓰는 두 사람이 서로를 원망하며 오후를 보낸다. 대체 어디서부터 꼬였길래 이 장면은 매주 반복될까.
솔직히 말하면, 이건 누가 더 예민한지의 싸움이 아니다. 대부분은 일부러 떠넘기려는 사람도, 일부러 버티려는 사람도 없다. 그런데도 싸움이 나는 건 역할의 경계가 흐릿하고, 그 흐릿한 자리에 책임이 비어 있기 때문이다.
요청하는 쪽에서 보면 그 일은 당연히 저쪽 몫이다. 자기 부서의 일이 저쪽을 거쳐야 끝나니, 저쪽이 손을 대주는 건 협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받는 쪽에서 보면 그 일은 당연히 그 부서의 몫이다. 내 업무표 어디에도 없는 일이 메신저 한 줄로 들어오니, 그건 협조가 아니라 떠넘기기로 읽힌다. 둘 다 자기 자리에서는 틀린 말이 아니다. 그래서 더 풀리지 않는다. 둘 중 누구도 틀리지 않았으니, 둘 사이에 선을 그어줄 사람이 나서야 하는데 그런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다.
사실 회사의 일이란 게 원래 칼같이 잘려 있지 않다. 처음부터 두 부서가 붙어야 끝나는 일이 있고, 앞 단계가 끝나야 뒷 단계가 움직이는 일이 있다. 그러니 일이 많아질수록 "누가 어디까지 하고, 어디서부터는 같이 정한다"는 선이 더 필요해진다. 그런데 많은 회사가 그 선을 긋지 않는다. 몰라서가 아니라 귀찮아서다. 선을 그으려면 누군가는 회의를 잡고, 누군가는 자기 부서의 일이 늘어나는 걸 받아들여야 하는데, 그 불편함을 감수할 사람이 위에 없다.
더 고약한 건 그다음이다. 선이 없으면 일이 꼬이고, 일이 꼬이면 사람이 먼저 지친다. 처음엔 그냥 불편한 정도다. 그러다 한 번 미뤄지고, 한 번 떠넘겨지고, 한 번 답장 없이 무시당하면 그때부터는 일보다 사람이 눈에 들어온다. "이거 확인바랍니다"라는 여덟 글자가 "이 사람은 나를 우습게 보나"로 번역되는 순간, 실무는 이미 반쯤 망가진 셈이다. 그 뒤로는 같은 요청도 보낸 사람 이름을 보고 판단하게 되고, 그 판단이 다시 관계를 깎는다.
작은 회사일수록 이 꼴은 더 노골적이다. 누구 목소리가 더 크냐에 따라 일이 넘어가고, 이 회사 터줏대감이자 고인물의 한마디가 규정보다 더 강력하다. 그렇게 경계는 문서가 아니라 친분과 연차로 정해진다. 참 편리한 방식이다. 그 편리함의 청구서가 늘 성실하고 책임감 있는 실무자 책상으로 날아온다는 점만 빼면.
위에서 보면 별문제 없어 보인다. 일은 어떻게든 굴러가고, 사람들끼리 알아서 맞춰가니까. 그런데 그 '알아서'의 실체를 들여다보면 늘 같은 얼굴이 있다. 성실해서 한 번 받아준 사람은 계속 받아야 되는 사람이 되어 있고, 눈치껏 피한 사람은 누가 말만 걸어도 피하려고 하는 자세가 몸에 배어 있다. 그렇게 조직은 공정한 기준이 아니라 가장 거절 못 하는 사람을 퇴사할때까지 계속 굴려먹는 식으로 돌아간다. 이렇게 회사가 본인의 책임을 다하지 않고, 손을 놓으면 직원은 협업이 아니라 생존부터 배우려 한다. 이 회사에서 버티면서 월급을 받으려면 상식적으로 행동하면 안된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그러니 메신저 한 줄에 속이 끓는 건 당신 그릇이 작아서가 아니다. 누구 일인지 아무도 정해주지 않은 일을, 매번 당신이 혼자 판단해야하는 상황에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이 올때마다 몹시 피곤한 건 당연하다.
이런 회사는 절대 저절로 나아지지 않는다. 다음 주 월요일에 업무 분장표가 새로 나올 리도 없고, 저쪽 부서장이 "앞으로는 저희가 하겠습니다"라고 할 리도 없다. 기다리는 동안에도 메신저 창은 계속 뜬다. 그러니 내 쪽에서 할 수 있는 것부터 손대는 수밖에 없다.
먼저 내 일이 어디까지인지 한 번 적어둔다. 거창한 문서가 아니어도 된다. 메모장 한 쪽에 '내가 끝까지 책임지는 일', '내가 도와줄 수는 있는 일', '내 일이 아닌 일'을 나눠 적어보면, 그 순간부터 요청을 받을 때 머릿속이 덜 시끄러워진다. 기준이 없는 사람은 매번 처음부터 고민하고, 고민하다 지쳐서 결국 받아준다. 받아주겠다고 마음먹고 받아주는 것과 스스로 기준이 흔들려 상대방에게 말려들어서 받아주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다.
거절은 굳이 험하게 할 필요 없다. 기분 나쁘게 거절하면 그 사람이 터줏대감이거나, 고인물일 경우 본인의 정치력과 영향력을 총 동원하여 당신을 찍어누르려 할 것이다. 이는 결코 이길 수 없는 불리한 전쟁이 되고, 그 기간이 길어질수록 상대방은 당신이 이 회사에 버틸수 없을 정도로 괴롭힐 것이다. 심지어 내 상사에게 정치력을 행사해서 나의 상사가 나에게 직접 "해줘라"라는 지시를 하게 만든다. 그러니 거절할 때는 차분하게, 경계선을 알려주며 구분을 지어주는 정도로 말하는 편이 좋다.
"이 부분은 제가 여기까지는 봐드릴 수 있는데, 그 다음은 제 담당 범위를 넘는 것 같습니다."
"이건 저희 팀장님과 먼저 협의해 주시면 진행이 빠를 것 같아요. 제가 결정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이건 싸우자는 말이 아니다. 어디까지가 내 몫인지 상대도 알아듣게 표시하는 말이다. 한 번 그어둔 선은 다음 요청이 들어올 때 기준이 된다.
말로 끝내지 말고 흔적도 남긴다. 메신저든 메일이든 "말씀하신 건 ○○까지 확인했고, △△부터는 그쪽 부서 확인이 필요해 보입니다" 정도를 한 줄 남겨둔다. 나중에 일이 틀어졌을 때 누가 어디까지 했는지를 다시 확인할 수 있는 건 기억이 아니라 그 한 줄이다. 나를 지키는 장치는 거창할 필요가 없다. 날짜와 범위가 적혀 있으면 충분하다. 계속 증거를 남겨 놓아라.
물론 이런 방법이 안 통하는 곳도 있다. 거절했다는 이유로 다음 평가가 달라지는 곳, 상사가 "그냥 좀 해줘"로 모든 선을 지워버리는 곳. 이런 경우, 거기서 더 밀어붙이면 나만 다친다. 그럴 땐 이기려 하지 말고, 적어도 내가 어디까지 떠안았는지만 기록해 둔다. 선을 지키지는 못해도, 선이 어디서 무너졌는지는 남겨둘 수 있다. 그건 나중에 이 자리를 계속 지킬지 판단할 때 쓸 근거가 된다.
일이 꼬일 때마다 "내가 좀 더 센스 있게 받았으면 됐나" 하고 되감아보는 사람이 있다. 대개 그런 사람이 제일 많이 떠안고 있다. 하지만 경계 자체가 없는 조직에서 일이 꼬이는 건 센스가 모자라서가 아니라 아무도 정리하지 않아서다. 무책임한 사람이 회사에 많다는 것이다. 내가 다 받아내지 못했다고 내 성격에 구멍이 있는 게 아니다. 시스템이 할 일을 안 한 자리에, 내가 서 있었을 뿐이다. 회사의 구멍을 내 몸을 희생해서 매꾸고 있단 것이다.
그리고 메신저 저편의 그 사람도 아마 나와 같은 처지일수도 있다. 물론, 막무가내로 뻔뻔한 사람이 대부분이겠지만, 의의로 아닌 경우도 있다. 그쪽도 위에서 내려온 일을 들고, 어디로 넘겨야 할지 몰라 제일 잘 들어줄 것 같은 사람한테 한 줄을 던졌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그 일을 내가 받아줘야 하는 건 아니다. 그래도 원망을 그 사람 얼굴에 다 쏟을 필요는 없다는 것, 그것만 알아도 오후가 조금 덜 쓰다.
그러면 내가 방금 입사한 회사가 어떤 회사인지 알 수 있는 방법은 있을까? 앞에서 한번 언급했듯이 ‘직무기술서’가 있는 건지 조회해보는 것이다. 그리고 ‘전결규정’이 있어 각 업무의 결재라인과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 문서화 된 것을 찾아보면 된다.
이 2가지만 있어도 다툼이 생길때 어느정도 기준이 되어 협의가 가능해진다. 다만, 회사에 들어왔는데 이런 기준이 없다면 위에서 언급한 일들이 반드시 일어날 것이다.
사실 조직문화라는 것이 바뀌기 쉽지않다. 어떤 경우는 정말 안좋은 조직문화가 있음에도 회사가 폐업할때까지 유지되는 경우도 있다. 만약 이런 조짐이 보인다면, 하루하루 내 커리어 쌓는 것에 집중하며, 최대한 방어력을 업그레이드 해가면서 체계가 잡힌 회사를 찾는 것이 좋을 것이다. "상황이 이러니까", "할 사람이 없어서 어쩔 수 없으니까"라고 하면서 혼자 희생하지 말자. 그 희생은 아무도 고맙게 생각안한다. 어쩔 수 없이 하게된 그 일들은 내 경험치로 만들고 커리어로 발전시켜 이력서에 한줄씩 추가하자. 그리고 체계가 잡힌 새로운 일터를 찾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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